개봉 3개월 차에 접어든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여전히 극장가에서 존재감을 이어가며 17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2월 4일 개봉한 이 영화는 5월 14일까지 누적 관객 수 1685만 209명을 동원했다. 한국 영화 한 편이 이토록 오래, 이토록 깊이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뒷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스크린 밖에도 이 영화가 남긴 흔적들이 선명하다.
왕과 사는 남자 촬영지 – 현장을 찾아 나선 제작진의 고집
실제 촬영은 영월, 문경, 고령, 평창 등 대한민국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작중 무대인 단종의 유배지는 영월의 청령포인데, 이곳은 완전히 관광지가 되어버려서 제작진은 청령포와 최대한 유사한 다른 장소를 찾았고 그 지류 중 한 곳에서 배소 촬영을 진행했다. 그렇게 선택된 장소가 바로 강변에 높이 약 70m의 기암괴석이 솟아 있는 '선돌' 앞 공터였다.
청령포에서 직접 촬영하기가 어려워지자 유사한 지형을 찾았고, 선돌 앞 공터가 촬영지로 낙점되었다. 선돌은 2006년 개봉한 영화 '가을로'의 촬영지였는데, 당시 주연 배우인 유지태가 '왕과 사는 남자'에서 한명회 역을 맡았다는 점도 흥미로운 연결고리다.
촬영 현장을 마련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길이 없어 토목공사까지 해서 길을 내고, 큰 차도 못 들어오는 곳에 배소 오픈세트를 지었다. 배소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많은데, 누가 찾아올 수 없는 곳이라 촬영 내내 스태프들과 배우들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비가 많이 오면 침수가 되며 법적으로 영구 건축이 불가능한 지역이라 영화 촬영이 종료된 이후 부득이하게 모두 철거 및 원상복구했다.
충의공 기념관에는 물속에서 단종의 시신을 건져 올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엄흥도 동상이 조성되어 있는데, 장항준 감독과 극 중 엄흥도 역을 맡은 배우 유해진이 이 동상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후문이다. 세트장은 철거되었지만, 그 자리에 남은 이야기들은 영화보다 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노루골은 어디에서 촬영됐을까
노루골 장면은 평창군 미탄면에 위치한 '웰컴 투 동막골' 세트장에서 진행되었다. 이미 한 편의 명작이 태어났던 땅 위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쌓인 셈이다. 촬영지 곳곳에는 이런 식의 사연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촬영지가 불러온 영월의 변화
주요 촬영지였던 강원 영월군의 경우, 영화 개봉 이후 관광객 유입이 늘어나면서 지역 상권도 활기를 띠고 있다. 영월군에 따르면 개봉 후 4주간 지역 소상공인들의 일평균 매출은 개봉 이전 대비 35.7% 증가했고, 전년 동기와 비교해도 16.4% 늘어난 수치다.
단종의 유배지로 알려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장릉과 국가 명승 청령포에는 올해 들어서만 52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린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장릉과 청령포의 연간 관람객 수를 이미 크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영화 한 편이 한 도시의 한 해 기록을 통째로 바꾼 것이다.
영화 개봉 이후 세조의 광릉은 카카오맵에서 별점 테러를 당해 장소 세이프 모드가 발동되었으며, 극 중 한명회의 천안시 묘역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 이 작은 해프닝은 역설적으로,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들을 얼마나 실감나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왕과 사는 남자 OST – 달파란이 만든 시대의 소리
영화의 감동에 깊이를 더한 것은 음악이었다. OST는 달파란 음악감독의 섬세한 음악으로 영화의 감정을 더욱 깊이 있게 확장한다. '탈주', '독전', 시리즈 '무빙', '킹덤'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선보여온 달파란은 이번 작품에서 서양 현악기와 국악의 현악기 및 타악기를 조화롭게 엮어 전통성과 현대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사운드를 완성했다. 절제된 선율로 인물의 내면을 비추고, 때로는 깊은 감정의 파동을 섬세하게 끌어올리는 음악은 단종 이홍위와 광천골 사람들이 함께했던 시간의 정서와 여운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전미도가 노래한 '벗' – OST가 된 매화의 마음
관객 1600만 돌파 즈음 발매된 OST '벗'은 달파란 음악감독이 작곡하고 윤종신이 작사를 맡았으며, 극 중 매화 역을 맡은 전미도가 직접 가창에 참여했다. OST '벗'은 홍위를 향한 매화의 감정을 담은 서정적인 발라드로, 영화의 마지막 여운을 음악으로 확장했다. 뮤지컬 배우로도 인정받은 가창력을 바탕으로 매화의 섬세한 감정을 담아냈으며, 달파란 음악감독은 "아련하고 아쉬운 마음, 영화의 의미와 감동을 정리하는 기분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영화의 주제곡으로 꼽히는 '꽃이 피고 지듯이'는 왕사남의 핵심 테마곡으로 많은 관객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OST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화려함보다 절제이다. 그 절제가 오히려 보는 이의 감정을 더 깊이 건드렸다.
1685만이 증명한 것
초반부에 웃기고 후반부에 울리는 공식으로 만들어진 한국 영화들은 일명 신파라 불리며 비판을 받지만, '왕과 사는 남자'의 이례적인 대흥행은 잘 만들 경우 여전히 가장 많은 대중들을 끌어올 수 있는 장르임을 입증했다. 비슷한 계열의 영화들 중 관객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에게도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 영화는 신파의 전성기였던 2010년대 개봉작들의 성적조차 넘어서는 폭발적인 역주행을 기록했다. 이는 한국 관객들이 그간 '작품성을 갖춘 감동'에 목말라 있었으며 '왕과 사는 남자'가 그러한 수요에 제대로 부응했음을 알리는 지표이다.
🎬 영월의 강변 바람, 선돌 앞 빈터, 그리고 달파란의 선율이 하나로 이어져 만들어낸 이 영화의 힘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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